사실 동지사에 시비가 있는건 알고 있었지만 여행책에도 아주 작게 소개되어 있어서 교토일정에는
동지사가 없었다. (약간 부끄러워진다.....-.ㅜ) 다시 짜기 시작한 교토 일정.
미리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찾아 봤지만 다들 동지사대학 사진 시비 사진은 있지만 정확한 위치를 설명해주는
글들을 없었다. 오히려 시비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거기에다 일본어도 능숙치 않아서
한참을 찾았다는 글들이 대부분이였다.
정보를 찾는 내내 나는 나중에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글을 하나 올려야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동지사
일본 교토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
구분
사립
개교연도
1875년
설립자
니지마 조
소재지
일본 교토
교지면적
871㎢
건물연면적
267㎢
교수 1인당 학생수
50명
전임교원수
450명(2000)
학생수
2만 2636명(2000)
장서량
184만여 권
1875년 그리스도교 전도사이자 교육자였던 니지마 조[新島襄:1843∼1890]가 세운 도시샤에이학교[同志社英學校]가 전신이다. 설립 당시의 교사는 니지마 조와 미국인선교사제임스 D.데이비스(James D. Davis) 2명이었으며, 학생은 8명이었다. 1904년 도시샤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12년 '전문학교령'에 따라 도시샤대학이 되어 신학부와 영문과·정치경제부를 개설하였다. 1920년 '대학령'에 따라 대학이 되었다가,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48년 교육제도 개편에 따라 새로운 체제의 대학이 되었다.
2001년 현재 신학부·문학부·법학부·경제학부·상학부·공학부의 6개 학부와 6개 연구과를 둔 대학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속도서관에는 184만여 권의 각종 도서가 소장되어 있으며, 부설시설로는 언어문화교육연구센터·이공학연구소·아메리카연구소·인문과학연구소·그리스도교문화센터·학술정보센터 등이 있다.
그리스도교 정신과 국제주의에 입각한 자유스러운 학풍 속에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대학으로 유명하며, 특히 윤동주가 이 대학 영문과에 재학중 사상범으로 몰려 옥사한 바 있다.
메인 캠퍼스는 교토시 가미쿄구[上京区]에 있는 이마데가와 캠퍼스로, 이 외에 교타나베시(市)에 교타나베[京田邊] 캠퍼스가 있다. 도시샤여자대학과 도시샤중·고등학교 및 유치원과 함께 종합학원 도시샤를 구성하고 있다.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은 동지사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
이곳이 바로 지하철 이마데가와 역. (간사이 스루토 패스로 무료 이용 가능)
3번 출구로 나오자 마자 왼쪽으로(역을 등지고) 돌아서 약 3분 정도 걸으면 동지사대 정문이 나온다.
가다 보면 정문 전에 서문도 나오는데 이왕이면 정문으로 들어가보자.
동지사 대학 정문.
오른쪽에 경비실이 있는데.. 이곳에 이야기 하면 학교 지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어로 되어 있는 지도라서 어차피 잘 읽지도 못하는거 안 받아버렸다.
동지사 대학은 오랜 역사를 증명이나 해주듯이 멋진 건물과 울창한 나무들이 학교를 아름답게 해주고 있었다.
정말 이것이 대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멋있는 동지사 대학.
요즘 대학들은 몇몇 대학 빼 놓고 신축건물들이 많아져서 그냥 감흥이 없었는데
이곳의 건물들과 조경은.... 정말 공부 하고 싶어지게끔 만들어 진것 같다. (물론 난 그래도 공부 안하겠지만..-.-)
정문에 있던 학교의 지도.
경비실에서 받을 수 있다는 지도가 바로 이 지도가 아닐까?
오른쪽 아래의 빨간 부분이 사진을 찍은 위치 이다.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있는 곳은... 24번 건물과 19번 건물 사이.
아주 작은 연못(연못이라고 하기에 좀 쑥스러운...)과 함께 있었다.
서문쪽에 있던 동지사대학의 지도.
윗 사진은 전체적인 지도 이고
아랫사진은 시비가 있는 부분을 클로즈-업 해서 찍은 사진이다.
이른 아침 시간, 거기다 겨울 방학기간이라 한가한 캠퍼스를 거닐며 어렵지 않게
윤동주, 정지용 시인의 시비를 찾을 수 있었다.
(역시 미리 미리 공부해간 보람이 있었다... ^^)
다행히도 어렵지 않게 찾은 시비들.....
왼쪽의 네모진 시비가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오른쪽의 둥그런 시비가 정지용 시인의 시비 이다.
윤동주 시인의 시비.
윤동주의 친필 이름이 새겨진 시비는 한글로 서시가 새겨져 있다.
일어로도 새겨져 있는데.... 약간 오역한 부분이 논란이 되기도 한다
[오마이뉴스 홍이표 기자]
▲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새로운 시비
ⓒ2006 홍이표
일본 제국주의가 그 마지막 기세를 떨치던 어두운 시절, 당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다니던 청년 시인 윤동주가 차디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의 유고 시집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가 그의 친구(정병욱 교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이후 출간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름 석자는 세월 속에 그냥 묻혀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그의 시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시(序詩)'가 한국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가 다녔던 모교, 연세대와 일본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캠퍼스 내에 시비로 각인돼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윤동주가 마지막까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 한국일보 > , 6월 27일자). 최근 나는 처가집이 있는 고베를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도시샤 대학에 이미 세워졌고, 이번에 또 다시 세워진 시비에는 터무니없는 오역이 연속해서 새겨졌음을 발견하니 그 기쁨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세워진 두 개의 시비는 윤동주와 그의 시를 오히려 왜곡하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문제의 주인공은 1984년 윤동주의 번역 시집을 출간한 이부키 고(伊吹 郷)씨이다. 그가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 신편 현대문 > 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 대학과 최근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그 시가 새겨져 있으며, 최근 소설가 공지영씨와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한일소설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 에도 그의 번역이 원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부키씨의 윤동주 시 번역은 지금 거의 다 일본어역의 정본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一点の恥辱なきことを、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わたしは心痛んだ。星をうたう心で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そしてわたしに?えられた道を歩みゆかねば。今宵も星が風に吹き晒らされる。(이부키 고, 伊吹郷 訳) 이부키씨의 '서시' 번역...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
하지만 이부키씨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신념이 깊게 배어있는 윤동주 시의 양 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왜곡하기까지 하였다.
'서시'의 첫 줄부터 살펴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윤동주 시인은 물리적 개념의 하늘(Sky)을 막연히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하늘'은 그의 맘 속에 뿌리내린 깊은 신앙의 고향을 의미한다.
이부키씨가 이것을 '소라(空)'라고 번역했으니 마땅히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 '덴(天)'으로 표현해야 한다. 또한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렇듯 우리 말 '하늘'은 그 자체로서 깊은 종교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 '소라(空)'에 님(사마, 樣)을 붙이면 '소라사마(空樣)'인데 그런 말은 없어서 매우 어색해진다. 따라서 일본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소라(空) 대신 "'하늘(天)'에 계시는"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의 갈릴리 땅 같았던 만주 용정에 나고 자란 그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조화된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윤동주의 생가에 가면 직접 구운 기왓장 하나에도 십자가와 석삼자(삼위일체), 그리고 태극문양을 함께 새겨 넣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사랑은 그의 뿌리였으며 그 중심에는 공허한 하늘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하늘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소라(空)' 대신 '덴(天)'을 써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오역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다짐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옮긴 것이다. 여기서 윤동주 시의 신앙적, 민족적 지조와 양심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다.
이국(異國) 혹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인해 어떤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하나님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이 다짐이, 마치 압제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안 생기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하듯이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사안일을 소망하는 구차한 시처럼 바뀌고 말았다. 만약 시인이 그러한 옹졸한 자세로 살았다면,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그의 마지막 삶의 행적은 쉽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라며 읊고 있다. 그는 점점 더 가혹해지는 민족과 세계민중의 기막힌 수난을 자신의 실존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도 이부키씨의 번역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이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며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도 '서시'의 이부키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이 돼버리지 않을까?"( < 한겨레신문 > 6월 16일자) 또 연세대의 정현기 교수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제3자에 의해 윤색된 1차 사료(일기, 편지 등)는 신뢰하지 않으며 연구에 가급적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듯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은 외면 받는 역사 사료와 그 무엇이 다를까?
▲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최근 재일교포학자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 일본인 문학가의 개인적 정서로 인해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바로 이부키의 번역에 있다"( < 한겨레신문 > 7월 14일자 '모어'라는 감옥)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세워진 윤동주 시비 위의 이부키 역 '서시'들 또한 계속해서 오해의 또 다른 실타래로 이어져 갈까봐 걱정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는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와 '보편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사랑'이라는 두 시각이 충돌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윤동주의 서시는 이미 기독교 신앙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에 대한 애환이라는 특수한 가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융합된 역설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도, 누락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원문이 왜곡됐는지의 여부인데, 심각한 오역이 일본에서 정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렇듯 윤동주의 시를 바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의 시 세계의 두 가지 체험과 가치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식민지 수난의 민족 일원으로서의 실존적인 고통 체험과 거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고 결단할 수 있게 뒷받침해주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다.
물론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그 폭을 확대시키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겠으나, 한 일본인 문인의 옹졸한 의도는 시인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적잖이 왜곡시키고, 교묘한 은폐의 의도로 얼룩진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고 말았다.
이번에 시비가 새롭게 세워진 곳은 시인의 도시샤 대학 유학시절 자취방이었던 다케다(武田) 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창작의 열정을 꽃피웠던 마지막 처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굴레가 씌워져 1943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알 수 없는 이유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함께 체포돼 역시 옥사한 시인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밝힌 바 있어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설도 있다.
그가 마지막 삶을 살았던 일본 교토의 한 변두리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가 또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잰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시비를 지켜보던 중, "윤동주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다"며 무심코 내뱉은 아내 미나꼬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윤동주는 어느새 교토지역의 관광자원으로 인식되고, 도시샤, 교토조형예술대학 등의 학교 홍보용 소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인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교수도 새로운 시비 건립 계획을 발표해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었다 기 보다는 무조건 시비만 세우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도구적 논리가 앞선 것 같다.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선생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 天と風と星と詩 > 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씨의 시집 < 空と風と星と詩 > 에 반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오역들이 모두 고쳐져 새롭게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부키씨의 번역이 새 시비 위에 버젓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두 시비 가운데 있는 문구.
잘은 모르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니 흡연을 금하라는 말 같다..... -.-;
윤동주 시인의 시비 옆에 나란히 위치해 있던 정지용 시인의 시비.
이른 아침이라 꽃을 준비하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항상 이곳에는 관광객들과 학생들(주로동지사대 한국 학생이겠지만...)이 꽃을 놓아 둔다고 한다.